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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열사 동생 전태삼씨가 29일 서울시 종로구 전태일 열사 동상 앞에서 '전태일 일기장 원본'을 공개했습니다.
전태일 열사의 유가족은 더 많은 사람이 이 일기를 읽고 전태일 정신을 되새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50년 동안 소중하게 보관해왔던 친필 일기의 관리를 '전태일 일기장 관리위원회'에 위임했습니다.
기증된 일기장은 총 7권 170여쪽 분량입니다.
원본은 전태일 열사의 동생 전태삼씨가 보관하고 있었답니다.
전태삼씨는 “형의 정신을 구현하고 실천해온 50년 동안 우리는 형의 희생을 기억해왔다”며 “전태일 형이 근로기준법을 굴리다 굴리다, 못다 굴린 덩이의 간이역을 지나서, 전부를 더불어 아우르는 중간역에 도착했다. 시대의 요청에 전태일의 동생 전태삼은 형의 육필일기장을 사회화한다”고 말했습니다.
시대상을 생생히 담은 전태일 일기는 학문적·역사적 가치가 높은 사료로 주목받아왔다고 합니다.
관리위원회는 “50년의 세월이 흘러 삶의 방식도 바뀌고 사회 환경도 달라졌지만, 지금의 청년들과 비정규직들도 미래가 없는 불안정한 삶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며 “자본과 이윤 중심의 세상을 넘어서는 꿈을 꾸는 이들이 점점 사라지는 세상에서, 전태일 열사의 일기는 다시 그 꿈을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관리위원회가 넘겨받은 전태일 일기 원본은 현재 보존처리를 진행 중이며 오는 5월1일 오후 6시30분 서울 동대문구 평화시장 옥상낙원DRP에서 ‘전태일 일기 바보낭독회’를 열 예정입니다.
일부 사진은 현장풀 사진입니다.(사진공동취재단)
위키백과에 요약된 전태일 열사입니다.
아버지가 사기를 당하여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서울로 올라와 청계천 피복 공장에 취직하였다.
1965년에는 청계천내 삼일회사 재봉사로 일하다가 강제 해고된 여공을 돕다가 함께 해고되었다.
이후 한미사의 재단보조로 있다가 재단사가 사장과의 갈등으로 해고되자, 그가 재단사가 되었다.
1968년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되어 1969년 7월부터 노동청을 방문, 노동자들의 열악한 환경 개선과 위생 환경 개선을 요구하였으나 번번히 거절당했다.
1969년 6월 청계천 공장단지 노동자들의 노동운동 조직 바보회를 결성하고, 다니던 교회와 엠마누엘 수도원 등에서 잡역부로 일하던 중 다시 왕성사의 재단사로 청계천으로 돌아와 노동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동대문구청과 서울특별시의 근로감독관과 노동청을 찾아가 열악하고 위험한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했으나 묵살당했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냈으나 전달되지 못했다.
1970년 10월에는 본격적으로 근로조건 시위를 주도하였다.
11월 근로기준법 화형식과 함께 평화시장 입구에서 온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라이터로 분신 자살하였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11월 27일 청계피복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노동 운동이 재확산되었다.
사건 당시 그는 친구 김개남(가명)에게 자기 몸에 휘발유를 다 부은후 성냥 불을 그어 달라고 했고, 익명의 친구는 그의 몸에 불을 붙였다.
불이 전신에 붙은채 평화시장을 뛰었지만 그는 방치되었다.
병원에 도착한 뒤에도 주사 비용이 필요하여 근로감독관의 보증이 필요하다 했지만, 근로감독관은 보증을 거부했고, 다시 옮겨진 명동성모병원에서는 가망이 없다는 이유로 3~4시간 방치하였다.
결국 당일 밤 10시에 요절했다.